오늘날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지휘자겸-피아니스트인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는 1941년 출생으로, 현재 파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흥미로운 이번 앨범을 통해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이룬 음악적 재능, 환상의 테크닉,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갈구하던 초기 시절을 돌아보며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한 1965년부터 1970년대 까지 그의 음악인생 초창기의 피아노 레코딩을 모아놓은 전집이다. 지금은 지휘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에센바흐의 초기 피아니스트로서의 음악성은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이번 브릴리언트 전집은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와 같은 독일 고전, 낭만주의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담고 있으며 한스 베르너 헨체와 같은 현대 레퍼토리도 담았다.
에센바흐 피아니즘의 정수는 맑고 투명한 텍스처와 신중하게 절제된 감정적 깨끗함이다. 그는 어떤 기쁨과 슬픔에서도 넘쳐흐르지 않으며 중용 유지해 가장 담백하고 깨끗한 상태의 심정을 건져올린다. 그래서 에센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 어떤 작품에서도 심리적 정화감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크게 평가받은 이유는 바로 모차르트의 고전파적 특성, 규칙적 템포와 일정한 리듬의 흐름을 정연하고 말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이내믹함과 극적인 효과는 덜 하지만 에센바흐의 피아노 속에는 그 어떤 표현보다도 뜨겁게 요동치는 명상적 치열함이 담겨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는 그런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푸가의 논리정연한 풀이, 그리고 그 스케일감이 안겨주는 경이로움이 웅대하나 흥분하지 않는 침착함으로 잘 녹아들어가 있다.
쇼팽의 전주곡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줄이고, 쇼팽의 서정성, 불안감, 동요, 탐미적 감수성과 같은 감정에 충실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특이한 점은 연주가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묵직한 감정이 더욱 짙어진다는 점이다. 느린 템포와 천천히 음미하는 프레이즈, 그 사이에 깃든 느긋함과 우울함이 누적되어 강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개성적인 연주다. 슈베르트야 말로 에센바흐가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는 에트빈 피셔의 연주를 연상시킨다. 묵직한 울림, 침묵에 가까운 경건함으로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표현해냈다. 피아노 소나타 D959, D960 두 곡이 담겨있다. 슈만의 ‘어린이 정경’은 이 음반의 가장 독특한 연주다. 해맑지만 어딘가 그늘이 깃든 표현에서 에센바흐의 멜랑콜리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5번 중에는 3번이 특히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2악장의 표현이 아름답기 그지 없으며, 1악장의 '노크선율' 역시 위엄과 품격을 갖추고 있어 3번 협주곡 전체를 단아하게 꿰뚫고 있다.